스토리 · 2026-07-16

ERP를 써도 '엑셀로 내보내기' 버튼은 왜 30년째 사라지지 않을까요?

'엑셀로 내보내기' 버튼은 ERP가 못나서 남은 게 아니에요. 시스템은 기록하는 도구고, 일은 질문에 답하는 것이라 생기는 문이에요. 없애야 할 건 버튼이 아니라, 버튼을 누른 다음의 여섯 단계예요.

세계 최고의 시스템을 쓰던 회사에서, 저는 매주 엑셀로 일했어요

요즘 스레드에 ERP 이야기가 한창이에요. "바이브코딩으로 ERP를 만들 수 있다"는 쪽과 "ERP가 뭔지 몰라서 하는 소리"라는 쪽이 정면으로 붙었죠. 그 논쟁을 보다가 옛날 생각이 났어요.

저는 SAP, 컨커, 세일즈포스를 다 쓰는 회사를 10년 다녔어요. 이름만 들어도 비싼, 세계에서 제일 좋다는 시스템들이죠.

그런데도 저는 매주 시스템에서 자료를 내려받아서, 엑셀로 정리하고, 보고서를 만들었어요. 10년 내내요.

저만 그런 게 아니었어요. 스레드에 이 이야기를 올렸더니 댓글이 이랬어요.

"보고서란 게 매주, 매월마다 다른 양식을 요구하기 마련이라 엑셀로 내보내기는 어쩔 수 없는…"

"진짜 엑셀 내려받기 기능이 없으면 망한 프로그램이죠. 디폴트네요."

그리고 어떤 분이 정곡을 찔렀어요.

"보고받는 윗분들이 상황 하나 바뀔 때마다 그 이슈에 포커싱된 표를 원하는데, 해결이란 게 있을 수 있을까요? 결국 ERP는, 보고서 쓰는 입장에선 raw 데이터를 퍼올 수 있는 데이터베이스다 — 정도의 의미인 것 같아요."

이 댓글이 30년짜리 수수께끼의 답을 절반쯤 말해주고 있어요.

시스템은 기록하는 도구고, 일은 질문에 답하는 거예요

ERP가 못나서 엑셀로 내보내는 게 아니에요. 구조가 그래요.

ERP, MES, CRM 같은 시스템은 기록을 위해 만들어졌어요. 거래를, 재고를, 생산을 정확히 남기는 게 존재 이유예요. 그런데 실제 회사의 일은 대부분 질문에 답하는 것이에요. 사장님이 물어요. "이번 달 A거래처 어때?" 은행이 물어요. "자금 계획 주세요." 내일 회의가 물어요. "지난 분기랑 비교하면?"

문제는 여기 있어요. 질문은 매번 다른데, 시스템 화면은 늘 똑같아요. 시스템은 시스템의 구조대로 데이터를 보여주고, 질문은 질문의 모양이 따로 있으니까요. 그래서 사람이 데이터를 꺼내서, 엑셀로 내보내서, 질문의 모양으로 다시 조립해요.

엑셀로 내보내기 버튼은 시스템의 언어를 질문의 언어로 옮기는 문이에요. 질문이 사라지지 않는 한, 이 문은 사라질 수 없어요. 30년 동안 어떤 프로그램도 이 버튼을 못 없앤 이유예요.

진짜 일은 '내려받기 다음'에 있어요

그 문을 지나면 무슨 일이 벌어질까요? 대부분 이 여섯 단계예요.

  1. 내려받고 — ERP에서, 쇼핑몰 관리자에서, 은행 사이트에서 각각
  2. 합치고 — 여러 파일에, 메일로 온 것과 전화로 들은 것까지 끼워서
  3. 모양을 바꾸고 — 질문에 맞게 정렬하고 추리고
  4. 계산하고 — 시스템이 안 해주는 우리 회사만의 산식으로
  5. 꾸미고 — 받는 사람이 원하는 양식으로
  6. 보내고 — 메일로, 카톡으로, 보고서로

이게 매주, 매달, 같은 질문에 대해 반복돼요. 그런데 이 여섯 단계는 어느 회사 조직도에도, 어느 채용공고에도 없어요. 아무도 "일"이라고 부르지 않아요. 그냥 "일하다 보면 하는 것"이에요. 보이지 않는 노동이라서, 30년 동안 아무도 못 풀었던 거예요.

왜 지금까지는 못 없앴고, 왜 지금은 다를까요

없애려는 시도가 없었던 게 아니에요.

리포팅 도구들은 "엑셀을 대체하겠다"고 했다가 실패했어요. 사람들은 엑셀의 자유를 사랑하고, 새 도구는 또 하나의 배워야 할 시스템일 뿐이니까요. 매크로와 RPA는 "클릭을 자동화하겠다"고 했다가, 파일 양식이 조금만 바뀌어도 깨졌어요. 예전 도구들은 전부 글자와 위치가 고정돼야 작동했는데, 사람이 만드는 엑셀은 매달 조금씩 다르거든요.

최근 2–3년 사이에 처음으로 달라진 게 있어요. AI가 파일을 '글자'가 아니라 '뜻'으로 읽게 됐어요. "카라기난"과 "카라기난(겔화 기제)"이 같은 원료라는 걸 알아요. 열 위치가 바뀌어도 품목명을 찾아내요. 작년 보고서 열두 개를 보여주면 그 모양대로 새 보고서를 만들어요.

저희가 한 제조회사에서 직접 재봤을 때, 명칭이 제각각인 자재 목록 전개가 95% 이상 일치했어요. 3명이 매일 하던 취합 작업이 몇 초가 됐고요. 어떤 일에 AI가 필요하고 어떤 일엔 필요 없는지는 따로 정리해뒀어요.

그러니까 이제 할 수 있는 건 "엑셀 버튼을 없애는 것"이 아니에요. **"버튼을 누른 다음의 여섯 단계를 없애는 것"**이에요. 내려받기는 그대로 두세요. 사라져야 하는 건 그다음의 노동이에요. 완성된 초안이 아침에 메일로 도착하고, 사람은 검토만 하는 방식으로요.

우리 회사의 병목을 찾고 싶다면, 질문 하나면 돼요

컨설팅도 긴 설문도 필요 없어요. 다음 회의에서 이 질문 하나만 돌려보세요.

"엑셀로 내려받고, 그다음에 뭘 하세요?"

"뭐가 불편하세요?"라고 물으면 다들 "괜찮은데요"라고 답해요. 매일 하는 일은 불편이 아니라 그냥 '일'로 느껴지니까요. 하지만 "내려받고 나서 뭘 하냐"는 사실을 묻는 질문이라, 진짜 답이 나와요. "합쳐서 보고서 만들어요", "다른 파일이랑 맞춰봐요", "옮겨 적어요"…

나온 답을 받아 적으면 그게 그 회사의 병목 목록이에요. 거기에 "한 달에 몇 번?"과 "한 번에 얼마나?"만 붙이면 크기까지 나와요. 매일 30분이면 1년에 한 달치 근무예요. 반복 업무에 새는 시간이 얼마인지 같이 세어보고 싶으시면 알려주세요.

무엇부터 자동화할지 고르는 기준도 같은 원리예요. 화려한 것이 아니라, 반복되고, 양식이 정해져 있고, 원본 파일이 이미 있는 것부터요.

다시, ERP 논쟁에 대해

바이브코딩으로 ERP를 만들 수 있느냐. 저는 이 질문이 핵심이 아니라고 생각해요.

댓글에서 어떤 분이 이렇게 쓰셨어요. "기능 구현이 문제가 아니라 업무 프로세스가 문제 아닐까요? 아무리 잘 만들어도 쓰는 사람이 옛날 방식을 고집하면 또 엑셀 내보내기 버튼을 만들 수밖에 없을 거예요."

맞아요. ERP가 됐든 SAP이 됐든 바이브코딩이 됐든, 중요한 건 그걸 갖고 일하는 사람들이 실제로 어떻게 일하는지예요. 그걸 모르면 뭘 만들어도 사람들은 엑셀 버튼부터 눌러요. 그걸 알면, 만들지 않고도 없앨 수 있는 일이 꽤 많아요.

저는 요즘 여러 제조·유통 회사에서 그 "내려받기 다음"의 일들을 하나씩 없애는 작업을 하고 있어요. 하다 보니 회사마다 다르면서도 놀랍도록 비슷해요. 그 사례들을 계속 정리해서 올릴게요.

대표님 회사의 "내려받은 다음"은 무엇인가요?

자주 묻는 질문

ERP가 있는데도 왜 엑셀로 내보내서 일하나요?+

ERP 같은 시스템은 기록을 위해 만들어졌고, 회사의 일은 대부분 질문에 답하는 것이기 때문이에요. 질문은 매번 다른데 시스템 화면은 늘 똑같아요. 그래서 사람이 데이터를 꺼내 질문의 모양으로 다시 조립해요.

엑셀 보고서 작업에서 진짜 병목은 어디인가요?+

내려받기 다음의 여섯 단계예요. 내려받고, 합치고, 모양을 바꾸고, 계산하고, 꾸미고, 보내는 일이요. 이 일은 어느 조직도나 채용공고에도 없는 보이지 않는 노동이에요.

예전 매크로나 RPA로는 왜 안 됐나요?+

예전 도구들은 글자와 위치가 고정돼야 작동했어요. 그런데 사람이 만드는 엑셀은 매달 조금씩 달라서, 파일 양식이 조금만 바뀌어도 깨졌어요. 요즘 AI는 파일을 글자가 아니라 뜻으로 읽어요.

AI로 엑셀 취합을 자동화하면 얼마나 정확한가요?+

한 제조회사에서 직접 재봤을 때, 명칭이 제각각인 자재 목록 전개가 95% 이상 일치했어요. 3명이 매일 하던 취합 작업이 몇 초가 됐고요.

우리 회사 병목은 어떻게 찾나요?+

다음 회의에서 「엑셀로 내려받고, 그다음에 뭘 하세요?」라고 물어보세요. 나온 답을 받아 적고, 한 달에 몇 번인지와 한 번에 얼마나 걸리는지를 붙이면 크기까지 나와요. 매일 30분이면 1년에 한 달치 근무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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