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엑셀로 내보내기' 버튼은 왜 30년째 사라지지 않을까

Jason

요즘 스레드에 ERP 이야기가 한창입니다. "바이브코딩으로 ERP를 만들 수 있다"는 쪽과 "ERP가 뭔지 몰라서 하는 소리"라는 쪽이 정면으로 붙었죠.

저는 그 논쟁을 보다가 옛날 생각이 났습니다.

세계 최고의 시스템을 쓰던 회사에서, 나는 매주 엑셀로 일했다

저는 SAP, 컨커, 세일즈포스를 다 쓰는 회사를 10년 다녔습니다. 이름만 들어도 비싼, 세계에서 제일 좋다는 시스템들이죠.

그런데도 저는 매주 시스템에서 자료를 내려받아서, 엑셀로 정리하고, 보고서를 만들었습니다. 10년 내내요.

저만 그런 게 아니었습니다. 스레드에 이 이야기를 올렸더니 댓글이 이랬습니다.

"보고서란 게 매주, 매월마다 다른 양식을 요구하기 마련이라 엑셀로 내보내기는 어쩔 수 없는…"

"진짜 엑셀 내려받기 기능이 없으면 망한 프로그램이죠. 디폴트네요."

그리고 어떤 분이 정곡을 찔렀습니다.

"보고받는 윗분들이 상황 하나 바뀔 때마다 그 이슈에 포커싱된 표를 원하는데, 해결이란 게 있을 수 있을까요? 결국 ERP는, 보고서 쓰는 입장에선 raw 데이터를 퍼올 수 있는 데이터베이스다 — 정도의 의미인 것 같아요."

이 댓글이 30년짜리 수수께끼의 답을 절반쯤 말해주고 있습니다.

시스템은 기록하는 도구고, 일은 질문에 답하는 것이다

ERP가 못나서 엑셀로 내보내는 게 아닙니다. 구조가 그렇습니다.

ERP, MES, CRM 같은 시스템은 기록을 위해 만들어졌습니다. 거래를, 재고를, 생산을 정확히 남기는 게 존재 이유입니다. 그런데 실제 회사의 일은 대부분 질문에 답하는 것입니다. 사장님이 묻습니다 — "이번 달 A거래처 어때?" 은행이 묻습니다 — "자금 계획 주세요." 내일 회의가 묻습니다 — "지난 분기랑 비교하면?"

문제는 여기 있습니다. 질문은 매번 다른데, 시스템 화면은 늘 똑같습니다. 시스템은 시스템의 구조대로 데이터를 보여주고, 질문은 질문의 모양이 따로 있으니까요. 그래서 사람이 데이터를 꺼내서 — 엑셀로 내보내기 — 질문의 모양으로 다시 조립합니다.

엑셀로 내보내기 버튼은 시스템의 언어를 질문의 언어로 번역하는 문입니다. 질문이 사라지지 않는 한, 이 문은 사라질 수 없습니다. 30년간 어떤 프로그램도 이 버튼을 못 없앤 이유입니다.

진짜 일은 '내려받기 다음'에 있다

그 문을 지나면 무슨 일이 벌어질까요? 대부분 이 여섯 단계입니다.

  1. 내려받고 — ERP에서, 쇼핑몰 관리자에서, 은행 사이트에서 각각
  2. 합치고 — 여러 파일에, 메일로 온 것과 전화로 들은 것까지 끼워서
  3. 모양을 바꾸고 — 질문에 맞게 정렬하고 추리고
  4. 계산하고 — 시스템이 안 해주는 우리 회사만의 산식으로
  5. 꾸미고 — 받는 사람이 원하는 양식으로
  6. 보내고 — 메일로, 카톡으로, 보고서로

이게 매주, 매달, 같은 질문에 대해 반복됩니다. 그런데 이 여섯 단계는 어느 회사 조직도에도, 어느 채용공고에도 없습니다. 아무도 "일"이라고 부르지 않아요. 그냥 "일하다 보면 하는 것"입니다. 보이지 않는 노동이라서, 30년간 아무도 못 풀었던 겁니다.

왜 지금까지는 못 없앴고, 왜 지금은 다른가

없애려는 시도가 없었던 게 아닙니다.

리포팅 도구들은 "엑셀을 대체하겠다"고 했다가 실패했습니다. 사람들은 엑셀의 자유를 사랑하고, 새 도구는 또 하나의 배워야 할 시스템일 뿐이니까요. 매크로와 RPA는 "클릭을 자동화하겠다"고 했다가, 파일 양식이 조금만 바뀌어도 깨졌습니다. 예전 도구들은 전부 글자와 위치가 고정돼야 작동했는데, 사람이 만드는 엑셀은 매달 조금씩 다르거든요.

최근 2–3년 사이에 처음으로 달라진 게 있습니다. AI가 파일을 '글자'가 아니라 '뜻'으로 읽게 됐습니다. "카라기난"과 "카라기난(겔화 기제)"이 같은 원료라는 걸 알고, 열 위치가 바뀌어도 품목명을 찾아내고, 작년 보고서 열두 개를 보여주면 그 모양대로 새 보고서를 만듭니다. 저희가 한 제조회사에서 직접 재봤을 때, 명칭이 제각각인 자재 목록 전개가 95% 이상 일치했습니다. 3명이 매일 하던 취합 작업이 몇 초가 됐고요. (어떤 일에 AI가 필요하고 어떤 일엔 필요 없는지는 따로 정리해뒀습니다.)

그러니까 이제 가능한 건 "엑셀 버튼을 없애는 것"이 아닙니다. **"버튼을 누른 다음의 여섯 단계를 없애는 것"**입니다. 내려받기는 그대로 두세요. 사라져야 하는 건 그다음의 노동입니다 — 완성된 초안이 아침에 메일로 도착하고, 사람은 검토만 하는 방식으로요.

우리 회사의 병목을 찾고 싶다면, 질문 하나면 됩니다

컨설팅도 긴 설문도 필요 없습니다. 다음 회의에서 이 질문 하나만 돌려보세요.

💡

"엑셀로 내려받고, 그다음에 뭘 하세요?"

"뭐가 불편하세요?"라고 물으면 다들 "괜찮은데요"라고 답합니다. 매일 하는 일은 불편이 아니라 그냥 '일'로 느껴지니까요. 하지만 "내려받고 나서 뭘 하냐"는 사실을 묻는 질문이라, 진짜 답이 나옵니다. "합쳐서 보고서 만들어요", "다른 파일이랑 맞춰봐요", "옮겨 적어요"…

나온 답을 받아 적으면 그게 그 회사의 병목 목록입니다. 거기에 "한 달에 몇 번?"과 "한 번에 얼마나?"만 붙이면 크기까지 나옵니다. 매일 30분이면 1년에 한 달치 근무입니다. (반복 업무에 새는 시간이 얼마인지는 계산기에 넣어보면 바로 나옵니다.)

무엇부터 자동화할지 고르는 기준도 같은 원리입니다 — 화려한 것이 아니라, 반복되고, 양식이 정해져 있고, 원본 파일이 이미 있는 것부터.

다시, ERP 논쟁에 대하여

바이브코딩으로 ERP를 만들 수 있느냐 — 저는 이 질문이 핵심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댓글에서 어떤 분이 이렇게 쓰셨어요. "기능 구현이 문제가 아니라 업무 프로세스가 문제 아닐까요? 아무리 잘 만들어도 쓰는 사람이 옛날 방식을 고집하면 또 엑셀 내보내기 버튼을 만들 수밖에 없을 거예요."

맞습니다. ERP가 됐든 SAP이 됐든 바이브코딩이 됐든, 중요한 건 그걸 갖고 일하는 사람들이 실제로 어떻게 일하는지입니다. 그걸 모르면 뭘 만들어도 사람들은 엑셀 버튼부터 누릅니다. 그걸 알면 — 만들지 않고도 없앨 수 있는 일이 꽤 많습니다.

저는 요즘 여러 제조·유통 회사에서 그 "내려받기 다음"의 일들을 하나씩 없애는 작업을 하고 있습니다. 하다 보니 회사마다 다르면서도 놀랍도록 비슷합니다. 그 사례들을 계속 정리해서 올리겠습니다.

당신 회사의 "내려받은 다음"은 무엇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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